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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책 이야기

by 보통날들 2014. 7. 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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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_강신주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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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저자
강신주 지음
출판사
동녘 | 2014-06-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강신주가 권하는 우리 모두가 같지만 다른 부처, 혹은 주인이 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제목? 강하다.

다시 당신에게 물어 온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The Gateless Gate 라고 번역되는 무문관

'문이 없는 관문'

무문관이라는 제목을 그냥 방치하면 성급한 독자들은 무문관에서 기다리고 있는 48개의 계단에 오르기를 포기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해준다.

삶의 주인이 되면 풀수 있는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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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무문관> 서른 일곱번째 관문

과거의 기억속에 매몰되거나 미래의 염려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됩니다. 그 순간 잣나무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것, 사랑해야만 하는 것들도 우리 눈에 들어올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제 망친 시험이나 업무에 너무 마음을 둔다면, 영화를 봐도 영화를 볼수 없고 음악을 들어도 음악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섬세하게 읽어야 할 사랑하는 것에 관심을 둘 수 있겠습니까.

후회나 염려의 마음이 강하면 우리의 마음은 현재에 열릴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현재라는 시제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무문관> 마흔번째 관문

이 관문은 달마와 해가 사이의 선문답을 통해 가장 소박하고 원형적인 형태로깨달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통과 부자유는 자신의 부자유와 고통에 직면하지 않는 비겁함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려면 그 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불행한 자신을 이야기하는 나는 순간적이나마 불행한 자신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적어도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성복시인은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라고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무섭고 징그러워도 우리는 고름이 철철 흐르는 상처를 응시해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때에만 우리에게는 작으나마 치료의 전망이 생길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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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세상을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아야만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 걸음이었으니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걸음을 내딛지 않고 논의 되는 2보나 3보는 단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한 걸음을 걷지 않으면서 우리 뇌리에 떠오르는 2보나 3보는 구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덧없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2보나 3보, 혹은 n+1 보만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1보 내딛기가 무섭거나 1보 내딛는것을 회피하려는 무의식때문은 아닐까요.




"정상에 오른 사람은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해 되시나요? 화두와 같은 문제라고 당황하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세요. 당연한 말 아닌가요.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지금 정상에 서지 않았다는 것. 최소한 정상보다 낮은 어떤 곳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니까요.




용기가 있어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바로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근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근기여서 부처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상근기인 겁니다. 









집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삶을 주인으로 살아 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대한 집착만큼 우리 삶에 치명적인 집착이 또 있을까요?





말은 뺄 수 없는 칼과 같습니다. 그냥 죽을 때까지 사람의 마음에 꽂혀 있기 때문입니다.

경솔한 말 한마디가 자비는 커녕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길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침묵은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침묵 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잘 듣게 된다는 것이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만 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침묵해야만 합니다. 침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야" 부처입니다.

홀로 있을 때는 주인으로 살 수 있지만 타인과 만났을 때 바로 그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 일 수 있겠습니까.

혼자 있을 때도 주인이고, 열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이고, 만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일 수 있어야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과 실제로 부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앎이 도를 대신 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부처를 대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그것이 바로 평정심에 머무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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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않아야 하고,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한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계단이나 사다리에 의존해 절벽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이러이하게도 계단이나 사다리가 우리의 당당한 삶을 막고 있었던 셈입니다.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그것에 좌지우지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어느 순간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먄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와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아서 생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과거 선사들의 마흔여덟 가지 화두를 모은 책 <무문관> 문이 없는 관문

문을 찾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문을 통해서만 관문을 통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 문을 통과 할 수 없습니다.

문이 없으니까요. 반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쉬운 관문이지요. 문이 없으니 통과할 필요도 없고

이미 통과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문에도 의지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경전의 권위일 수도 있고, 불성과도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스스로 주인이 되려면 반드시 부정해야 할 대상이니까요.

그래서 무문스님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로 조주의 '무'라는 글자를 뚫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임제 스님의 말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서,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위대한 자유를 얻게" 될 테니까요.








::화두_상식을 넘어서야 답이 나오는 주제들. 상식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 아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는 답안들.

역설이야말로 삶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말씀하신 추만호 선생님의 말씀도 생각이 나고, 

역설로 가득찬 세상의 많은 질문들을 마주할 때 마다 조금 더 고개가 숙여지고, 나는 낮아진다.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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